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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신학 질의응답

[Re] 산상수훈 설교
22/11/07 18:16 | 이선희 명예교수 | ❤ 0 | 조회 327 | 댓글 0
1. 루터와 루터교의 입장은 질문자가 말한 대로 예수의 산상수훈을 (1) 실현 불가능한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예컨대  형제에  대하여  화를  품지도  말고[5:21ff],  여인을  보고
욕을 품지도 말라[5:27ff.]는 명령 같은 것), (2)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따라서
복음에 의지하게 하려는 의도, (3) 그래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믿고, 죄의 용서 를 받으며,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게 하고, 양심의 가책에서의 해방을 누리게 하려는 의도라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4) 이렇게 이신칭의를 받고 나서도 산상수훈은 여전히
실현 불가능한 명령 → 양심의 가책 → 복음에 의지 → 용서와 용납 → 양심의 죄책 감에서의
해방을 의도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지상 생활에서 끊임없이 반복 된다고 보는 것이
사실 루터와 루터파의 개념이다.

그래서 루터와 루터파는 이런 의 미에서도 “칭의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이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웨슬리가  주장하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영혼이 실 제로 믿음에서 나온 사랑으로만 충만하여 완전히 거룩한 상태, 그래서 사랑에서 나오는
의도의 완전한 순수성,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선행[율법의 준행]을 하나님이 완전 히 열납하신다는 사상)
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칼빈과 칼빈파도 루터 및 루터파 와 같은 입장이다. 칼빈파는 이것을
“이중용납의 교리”(duplex acceptio hominis)라 고 부른다. 즉, 칭의도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의 행 위 없이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것이고, 성화도
“나의 행위, 나의 생활, 나의 예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죄악되고
누추 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 위까지도
거룩하다고 받아주시는 것이다.”(한철하, 『21세기 인류의 살길』, P.206). 

그들의  입장을 웨슬리는  이렇게 파악했다:  율법(또는  여기서 윤리라고  잘못 부르 는 그것.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명령이고, 윤리는 인간끼리의 개 인적 또는 사회적 규범 내지 규칙의
약속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은 실현 불가능이 고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이신칭의의 복음에 의지하게 하는 것 은  율법의  세 가지  기능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율법의 세 가지 기능: (1) “the uses of the law. And the first use of it, without the question,
is to convince the world of sin.”(율법의 첫 번째 용도(=기능)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는  것이다).  (2)  “The  second use of it is to bring him unto life, unto
Christ, that he may live.”(율법의 두 번째 용도(기능)는 그를 살리기 위하여 생명에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얻으리라는 복음을 의지하게 만든다). 
그런데 웨슬리에 의하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는 “The third use of the law is to keep us alive.
It is the grand means whereby the blessed Spirit prepares the believer for larger communication
of the life of God”(율법의 세 번째 용 도는 우리를 계속 살아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용도야말로 복되신 성령께 서 믿는 자(=중생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의 보다
더 큰 소통을 할 수 있도 록 준비시키실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즉, 성령께서는  중생한 자에게 율법을
어기면 책망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격려하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고 하면 서  율법을 
지켜나가도록  역사하시는데,  이  성령의  역사에  잘  순종하면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생명과 더 큰
소통 속에서 성화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는 뜻. 주의할 점: 율 법을 지키는 것 자체는 생명을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데, 그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중생한 자를 준비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웨슬리가 일부러 강조한 것을 놓치지 말 것. 이것을 놓치면 신인협동설로 빠지기
시작하여 헤어 나오지 못하고 웨슬리를 끝까지 오해하는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웨슬리가 볼 때, 루터, 루터교, 칼빈, 칼빈교는 율법의 첫째, 둘째 용도만을 강조 하고,  세  번째  용도를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단동설을  강조하다보니까, 지나치게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이것이 결국에는 율법은 실현불가능이요 다만 복음에 로 인도할 뿐이라고 하는 견해를 갖게 한 것이다. 
그런데 (웨슬리 자신이 아니라) 웨슬리주의는 반대로 율법의 실현가능성을 지나치 게 강조하게 된다.
그 이유는 웨슬리가 강조한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지나치게 강조 했기  때문인데,  그것도  신인협동설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진실성(sincerity=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자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진심)과 노력으로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예수의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명령들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중생한 사람에게는 진실성과 행함의 노력으로 써 준행할 수 있는
소위 “그리스도인의 윤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웨 슬리신학의 특징이요, 루터교나 칼빈교와
다른 감리교의 신인협동적 장점이라고 (자아 도취적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신상수훈을 일종의
윤리라고 보는 점은 루터 (루터교),  칼빈(칼빈교),  (웨슬리를  오해한)  감리교가  모두  동일하다. 
다만  루터(루터 교),  칼빈(칼빈교)는  산상수훈을  “실현  불가능한  윤리”라고  보고,  (웨슬리를  오해한)
감리교는 산상수훈을 “실현 가능한 윤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웨슬리의 주장을 잘 보면 루터(루터교)나 칼빈(칼빈교)나 또한 웨슬리주의 (소위 감리교)와는
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즉, 웨슬리의 신인순응적 사고방식,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상호보완적 관 계에  대한  웨슬리의  개념.  ❶  신인순응적  사고방식: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설명할 때, 율법의 준행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과의 소통(즉, 성화=‘영혼과 삶을 점점 더 거룩하게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 성화를 위하여 성령이 준비시키시는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즉,  성화는 
이  준비가  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여  영혼 안에 발생시키는 무엇이라는 뜻). 이 말을 웨슬리는 이렇게도
말한다: 율법의 준행(또 는 경우에 따라, 은혜의 수단의 준행)은 그 자체에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그 자체의 
내적  능력이  없으며(no  inherent  power),  하나님께서  그  준행을  보시고  그 보답으로  성화를 주시는 
그런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다(no merit).4)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성령에 있으며,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웨슬리 의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인협력적 개념이 아니다. 인간은 율법을 행하도록
명령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율법을  행해야  한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율법준행의 선한 의지도 주시고, 그것에 순종하면 율법 준행의 힘도 주시는데, 여기에 순종하면 율법준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준행 자 체는  인간을  거룩하게  하거나  구원하는데  있어서  그  자체로서는 
no  merit,  no power다. 단지 율법준행은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때 약속대로 구원을 위한, 또는 성화를 위한,
역사를 해주시는 데 있어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준비작업일 뿐 이다.  그렇다면  그림은  분명하다. 
(1) 성령이  율법을  지키라고  경고,  격려,  설득하여 의지를 주시고, 순종할 때 율법준행의 힘도 주신다.
(2)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율 법[또는 은혜의 수단]을 지키면 은혜를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준행한다(그 점수는 하나님이  매기신다). 
(3)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가 기뻐하실 때(즉,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역사하신다
(즉, 각 경우에 따 라, 이방인의 믿음, 종의 믿음, 아들의 믿음, 성화를 일으키는 믿음을 주신다.
그 때 각 경우마다 양심, 회개, 칭의/중생, 성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신단동적인 것도 아니고,  신인협동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이것을  신인순응적인  것(⓷divine  gracious action to ⓶human submissive reaction to ⓵divine pre-action)이라고 부른다.
❷율법과  복음의 상호보완적  관계: 그래서  웨슬리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은 루터나 칼빈이
율법폐기론으로 오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처럼 상호 모순, 대립, 또는 양자 택일적인 관계에 있어서
율법은 지켜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복음 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만 있고, 율법에 의하여
인도되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위해서 는 필요한 것이 다 채워졌다고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 의 관계는 상호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즉,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무의미해지는 관계)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율법 속에 들어 있는
명령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써는 절대로 하나님의 눈에 들게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음(구원의  약속)을  주신  것인데, 이 약속은 이 복음을 신뢰하면,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하여 직접 역사하여 실제 로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율법준행이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동시에 율법이며 약속이다. 예컨대,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명령이며
동시에 복음이다. 즉,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을 간구하면, (네가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믿는 너의 행동이 너를 구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가 네 영혼에 직접 역사하여 믿음을
발생시키고, 그 믿 음을 보고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뜻이라고 웨슬리는 이해했다. 율법과 복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루터와 칼빈이
말한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네 영혼에 역사하여 믿음을 발생시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네가 그 율법을 실제로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예수의 산상수훈도 명령이요 복음이니까, 구원론이지만(복음) 동시에 윤리 (율법)라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전체의  구조를  웨슬리만큼  파악하지  못하면,  착각하기 
작한다.  (1)  복음일  뿐이다 라고 보는 입장이 말하자면 구원파 같은 식의 사고방식이다. 웨슬리 당시에는
모라비아파 같은 사람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율법은 필요 없고, 율법의 준행은 오히 려  믿음(복음,  믿음)을 
손상시킨다.  정숙주의(quietism).  (2)  산상수훈은  사람의  힘으 로 준행 가능한 율법이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주의(인단동설), 또는 사람의 노력에 의 한 도덕과 성결, 거룩을 강조하는 소종파 운동들.
(3) 산상수훈은 복음으로 인도하는 율법이다(위에서 본 바 대로 루터, 루터주의, 칼빈, 칼빈주의 등). 그리고 동시에
복음 인데, 이 산상수훈을 복음으로 믿으면, 우리는 실제로 그 율법으로서의 산상수훈을 지 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신다(신단동설). (4)  감리교주의:  산상수훈은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소위  믿음(진실성)을  갖고 소위 믿음의 힘으로 노력하여 지킬 수 있는 율법(그리스도인의 윤리)이다.
이것이 대 부분의 감리교나 성결교의 웨슬리신학자들의 신인협력설적 시각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본  산상수훈은  율법이며  동시에  복음인데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산상수훈은 사람의 타고난 의지나 능력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이다, (2) 신인 순응설적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얻고, 중생한 자라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율법준행의
의지와 힘을 얻어서 실제로 준행 할 수 있는 율법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신실성과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통하여 실행하시는 율법이며 복음이다. 예컨대  마태  5장  21-26에  나오는  형제에게  화도 
품지  말라는  명령은,  웨슬리에 의하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는 항목에
대한 설명인데, 온유라는 영혼의 기질은 하나님의 약속과 역사에 의하여 영혼 안에 실현되는 (1) 하나님에 대한 굴복,
(2)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나 자신에 대한 만족, (3) 이웃에 대한 친절과 관용인데, 이 온유가
내 영혼 안에 실현되면 당연히 나 의 미음과 입과 손발을 통하여 실현되는 명령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하나님 자신이 내게서 실현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마태 5장 27 이하에 나오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  안에서 그  여자를 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는 항목에 대한 설명이라고 웨슬리는 보는데, 이 명령도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로 만드실 때, 당연히 그 명령이 실제로 나의 마음과 눈과 입과
손발 안에서 지켜지는 것이라고 웨슬리는 보고 있다. 이것은 실현 불가능의 율법 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
지켜지는 율법이라는 말도 아니다. 또한 이것을 지 키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입장도
아니다.

웨슬리의 생각 은 (1) 신상수훈의 명령들은 사람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믿고 칭의/중생을 받은 사람만이 이것을 지킬 수 있다. (3) 그것 도 자신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대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의지 와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혼의 기질을 겸손/순종과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의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실제로 나의 내적 상태와 외적 삶 안에서 지켜진다는 뜻으로 웨슬리는 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윤리가 아니다. 그 이유: 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개는 이성과 상식과 관습을 통하여 만들어진
당연히 지켜야 마땅한 제반 규범과 규칙들이고, 그것 을 실제로 지키는 행위들이다. 기독교윤리라고 해도
그 기본 뜻은 동일하다. 그리스도 인으로서 그런 규칙들을 남들은 못해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양심과 이성과 상식을 가지고 지키자는 뜻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말하는 산상수훈의 규칙들 은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규칙들도 아니고, 그래서 일반 윤리도 아니지만,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하여
진실성과 노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열납 되게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루터나 칼빈의 말에 주목할 것).
산상수훈의 명령들을 사회 안에서 실제로 철저히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나
환영받을  수  없고,  오히려  불편한  사람,  기피하고  싶은  사람처럼  취급을  받게  된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윤리가 아니라, 하늘로 가는 구원의 길이다. 그 렇다면 산상수훈의 명령들을 내가 실제로
열납되게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이요 증 거인 것이다. 구원론적 현상이다. 그래서 웨슬리도 산상수훈을 윤리라고 부르지 않고,
“the  way  of  salvation”,  “the  true  way  to  life  everlasting”,  “the  way  to heaven”이라고 부른 것이다. 

윤리론와 구원론은 상호보완도 아니고, 상호병립도 아니고,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도 아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의미의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이 말씀하 는 소위 하나님의  “극단적인 요구”가 내 영혼과 삶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는 존재인데, 사회 안에서는 그 사회의 건강한 윤리를 따라 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런 윤리적인 삶이 자신 속의 차원 높은 하나님의 명령과 역사에 충돌되 거나 어긋나는 문제로 고민하며
기도하며 때로는 등경 위의 등불처럼 나타나게 또는 은밀한 가운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방식으로 이 잠시잠간의 세 상을 사는 사람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산상수훈이 말씀하는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0- (2020.3.14.토, 코로나19에 의한 재택근무 중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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