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가 그의 설교 “거의 그리스도인”에서 묘사한 거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소개드리고 설명하겠습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은 윤리적으로는
정상이고, 또는 모범적인 인간이지만, 칭의와 중생이 아직 없고 따라서 성화는
전혀 없는 인간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자신이 회심(=칭의/중생)을 체험하기 전에
거의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진정한(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 즉 칭의/중생을 받고
성화의 길을 가 는 그리스도인은 윤리적으로 진일보한 삶을 사느냐? 즉, 회심 후의
웨슬리는 윤리적으로 진 일보한 삶을 살게 된 것이냐? 웨슬리는 회심 전에도
거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윤리적 인 인간이었다. 윤리적 차원에서 별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회심 후에도 그는 윤리적인 면 에서 회심 전과 동일했다.
그는 여전히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윤리는 회심과 성 화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에, 즉 이성과 양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회심과 성화이전에도 아무 문제없이 윤리적일 수가 있었던 것이 다.
그러면 회심과 성화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무엇이냐? 윤리적인 무엇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엇을 더하여 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거의 그리스도 인”이라는
설교에서 말하는 대로, 진정한 칭의의 믿음과 거기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여기서
나오는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것이 없이는 마지막 심판 때 주님을 뵈올 수 없다 하는
그 거룩”이고, 이 거룩이 이제 내게 있으니, 영생에 대 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회심과 성화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다. 이것은 윤리와 상호동일한 것도 아니고, 상호인과관계도 아니고,
상호보완도 아니다. 다른 차원의 또 다른 무엇이다. 웨슬리가 회심 후에도 윤리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것은 회심과 성화 덕분 이 아니다. 그는 회심과 성화가 전혀 없었을 때에도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인간이 아니었고, 오히려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칭 믿음과
자칭 성화가 있었을 뿐이었 다. 회심 전에 그가 헐벗고 병든 이웃을 도운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윤리이지 만, 회심 후에 그가 헐벗고 병든 이웃을 도운 것은 윤리가 아니고 그가 말하는
그 거룩, 즉 “그것이 없이는 마지막 심판의 주님을 뵈올 수 없다는 그 거룩”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는 회심 전이나 회심 후나 윤리적인 인간이었지만,
그의 눈과 하나 님의 눈에는 그는 윤리적 인간이 아니라, 거룩한 인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I.(I).1.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에는 첫째로 ‘기독교 바깥에서 말하는 정직성’(heathen honesty)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 하나 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기독교 바깥에서 말하는 정직성이라는 것은 비기독교적 철학자들의 저술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직성이 아니라, 보통 기독교 바깥의 사 람들이 상호간에 상대방에게 기대하며 또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의 그런 정직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직성의 규칙에 따라 그들은 이렇게 교육받는다: 불공평하지 말 것, 강도든지 절도든 지
이웃의 물건에 손대지 말 것,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 것, 누구에 대해서도 착취하지 말 것,
어떤 상거래에 있어서든 가난한 자나 또는 부유한 자나 간에 속이거나 지나치게 값을 받지 말 것,
누구에게서든지 그의 권리를 빼앗지 말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구에게든지 어 떤 빚이든지 지지 말 것.
2. 다시 말하여 [이 정직성이라는 것은], 기독교 바깥의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로는 진 리와 공의를
존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거짓을 숨기기 위하여 神을 증 인으로까지 부르면서
위증하는 사람을 혐오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무고하게 비방하고 중상 하는 자를 혐오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종류든지 간에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을 인류 의 수치거리요, 사회의 기생충으로 여겼던 것이다.
3. 또 다시 말해서 [이 정직성이라는 것은], 그들도 상호 간에 일종의 사랑과 조력을 기대 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그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수 있다면 어떤 도움이라도
나에게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확대 하여, 비용이 들지 않거나 노력이 들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하게 인정을 베푸는 일들로 발 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는 음식이 있으면 굶는 자를 먹이며,
남는 옷으로 헐벗은 자를 입히 며, 일반적으로 내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로
발전시켰던 것 이다.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포함되는 첫 번째의 것으로서 기독교 바깥의 정직성이라는
것은 (가장 낮은 의미의 정직성을 보더라도) 이 정도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II).4. ‘거의 그리스도인’에 포함되는 두 번째의 것은 경건의 외양,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지라고 권하는 바
그 경건의 단지 외양을 갖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겉모양만을 갖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거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금하는 것을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1). 그는 하나님 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 그는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맹세하지 않 는다. 다만 그의 말은 “예 할 때는 예”요,
“아니요 할 때에는 아니요”이다. 그는 주일을 어기 지 않으며, 그의 문 안에 있는 객이라도 주일 어기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으로 행하는 모든 간음과 혼외정사와 음난한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들을 직접 또는 간접 으로 지향하는 경향성이 있는 모든 말이나 모양을 피한다.
또한 모든 쓸데 없는 말들을 피한다: 남을 욕하는 것, 남이 없는 데서 험담하는 것, 남에 관한 소문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것, 독설을 입에 담는 것, ‘어리석고 실없는 농담과 익 살’(eutrapelia) - 이것을 기독교 바깥의
도덕가는 일종의 덕목으로 간주하였지만 - 이 모든 것을 멀리 한다. 간단히 말하여, ‘덕을 세우는데’ 소용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바 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모든 언사를 피한다.
5. 그는 ‘술 취하지 아니하며’3), 주연을 베풀고 흥청거리는 일과 탐식하는 일을 멀리한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다툼과
언쟁을 피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한다4). 남에게서 해를 입는 경우에도, 그는 복수하지 않는다.
즉,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그는 이 웃의 실수나 인간적 한계에서 오는 결함에 대하여 불평스럽게 욕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큰소 리로 야단치지 않으며, 조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누구에게도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이 너에게 행하는 것 을 네가 원치 않는 그 모든 일을
너도 그에게 행하지 말라”5)는 평범한 준칙을 따라 행동도 하고 말도 한다.
6. 그는 선을 행할 때, 값싸고 손쉽게 인정 베푸는 정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 단을 다하여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애쓰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 일이 그의 친구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그의 적들을 위한 것이든, 또는 악한 자 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든 상관없이, 수고와 고통도
불구하고 ‘그 의 손이 할 일을 찾는 대로 어떤 일이든지 힘써 행한다’. 이 일이든지 다른 일이든지 간에 게으르지
아니하며, 선을 행할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모 두 위하여, 모든 종류의 선을 행한다.
그는 근성이 악한 자들을 훈계하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며, 흔들리는 자들을 굳세게 하 며, 선한 자들을 격려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그는 잠자는 자들을 깨우기 위하여 수고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깨우신 바의 사람들은
죄와 불결을 씻도록 열려 있는 그 샘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씻고 깨끗해지도록 돕는 일에 힘쓰고 애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이미 구 원받은 사람들을 북돋우어 범사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드높이도록 하는 일에 수고를
아끼 지 않는다. “이렇게 묘사된 인간을 웨슬리는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사람은 겉모양은
그리스도인과 같으나, 그 속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직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위선적인 인 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에 의하면, 올바른 의미의 “거의 그리스도인”은 진 실성(sincerity), 즉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바라는 진실된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윤리적 차원을 말한다면, 그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윤리적인 인간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인간이다. 그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윤리적이다. 그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윤리적 모범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왜 그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아니라, 거의 그리스도 인 밖에 못되는 것인가?
웨슬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에게는 아직 진정한(=하나님의 칭의 의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속죄공로를
근거로 죄책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 의 증언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 사랑과 여기서 나오는 진 정한 이웃사랑이 아직 없고, 그 이유는 아직 칭의의 은혜에 의하여 부어진
“믿음”(justifying Faith)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믿음과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 사랑과 여기서 나오는
이웃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인데, 그런 사람이 이제 행하는 것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것과 같은 것, 소위 윤리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진일보한 윤리 적인 것도 아니다. 그의 마음과 행동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성화된 것)이다.
거의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고, 종교적, 윤리적으로 모범 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거듭난 영혼과 거기서 나오는 행위는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하나님사랑과 거룩한 이웃사랑의 상태인 것이고,
이런 영혼에서 나오는 외적 행위들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거룩한 선행이다.
선행 의 뜻은, 적어도 웨슬리가 볼 때, 칭의의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그래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율법)의 준행이다. 그 이외의 행위들은 선행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 람들끼리 좋다고 인정하는
행위들이라면, 윤리적 행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거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내면과 외면은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온전한 그리스 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되면 더욱 윤리적인 수준이 되는 것인가?
만일 웨슬리가 거의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을 구별하지
않았다면, 산상수훈 대로 성화의 길을 잘 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행위를 더욱 윤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만큼 더욱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웨슬리는 거 의 그리스도인을 지극히 윤리적인 인간으로 그려놓고 그런 사람은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이다”, 즉 결국 지옥을 면하지 못한다고 평가한 것이다. 반면에 온전한(=진정한) 그리스도인,
산상수훈의 길대로 성화를 잘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은 사랑으로만 충만하여 거룩하다고 하고, 그의 행동은
진정한 의미의 선행,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동인 것이다. 이 둘 사이 의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는
영벌에 해당되고, 다른 하나는 영생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사회 의 윤리학에는 이런 차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의 윤리학의 눈으로 볼 때, 성화된 사람이 더욱 윤리적이다라고 보지 않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성화는 영생을 위한 것, 다 시 말해, 웨슬리의 표현대로, “그것이 없이는 마지막 심판 때, 주의 얼굴을 뵐 수 없으리라는
바로 그 거룩”을 위한 것이지, 윤리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성화의 사람이 비윤리 적이다 라는 말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뜻이 아니라, 성화된 사람의 윤리는 성화에 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사회의 윤리학자가 보기에도 성화가 잘 되면 그 만큼 윤리적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의 윤리학이 윤리적 인간이 되기 위하여 기독교나 또는 여타의 다른 고등종교를 갖게 하자고 말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윤리는 그 뿌리를 종교 또는 기독교의 성화와는 전혀 다른 것들에 두고 있기 때 문이다.
즉, 이성과 양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이성과 양심을 윤리적으 로 쓰도록 교육하여 개인과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이성과 양심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감화감 동 같은 것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공동기반이 있다면,
양심 정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성화된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이고, 윤리학의 양심은 사람들 앞에서의
양심이기 때문에 상호 대화의 기반으로서도 그 한계가 뚜렷하다. 만일 기독교인을 평가하여 “구원의 길을, 성화의 길을
잘 가고 있으면서, 또한 그의 삶은 그 사회 안에서도 그런 만큼 더욱 윤리적이었다” 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에
해당되 는 말들일 것이다:
(1) 성화와 윤리를 동일시 한 경우. 성화와 윤리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 혼용하여 사용한 경우다.
비학술적인 용어사용이고, 신학적, 윤리학적 진리 탐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혼동과 오류의 원인이 된다.
윤리학에도 신학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기독교적 윤 리학자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성화가 잘 되면, 사회 안에서도
그 만큼 더 윤리적이 존재 로 살 수 있게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이런 착각은 결국 성화를 윤리로 변질시켜서
“사회 안에서 모범이 되고 칭찬 받는 기독교인, 기독교, 교회가 되자” 부르짖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 게는 사회와
사람들의 칭찬이 그의 마음과 행동의 기준이 된다. 소위 ‘그 시대와 그 사회에 도덕적 모범이 되려는 마음으로
충실히 적응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이 경우에는 시야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사회윤리(소위 social ethics,
또는 social salvation, social sanctification[사회성화])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2) 성화를 윤리와 구별하지 못한 경우. 즉 기독교의 성화에 힘쓰는 것은 결국 여타의 고등종 교나 고등문화가 말하는
‘윤리적 삶’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성화의 길은 곧 인류 의 보편적 윤리의 이상, 말하자면 경천애인과 같은 것이다.
성화는 곧 양심적으로 서로 사랑 하고 살자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은 성경과 신학의고유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경우다. 예컨대 토착화신학이라고 하여 유교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 리는 결국 같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에
그런 오류를 흔히 볼 수 있다. 유교적 윤리가 결국 기 독교의 성화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예컨대 소위 “사람됨”이라는
개념이 양자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다라는 주장.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신학의 고유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많이 부족한 경우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소위 종교다원주의(모든 고등종교는 그 핵 심이 사랑으로서 상호 동일근본을
갖고 있다는 주장)가 여기에 해당된다.
(3) 윤리를 성화로 착각하는 경우. 즉, 윤리적 노력을 많이 하면 그 만큼 성화가 잘된다고 착 각하는 경우. 성화가 무엇인지,
성화가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회심 전에 웨슬리 자신이 이런 경우였고, 회심 전의 그런 자신을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비로소 회심 후에 깨닫고
그렇게 설명했던 것이다. 기독 교인들 가운데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또는 소위 해방신학, 민중신학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이 심화되면, 윤리가 신학을 대체하게 된다. 소위 인간 학이 신학을 대체하게 된다.
성경을 ‘참 사람 되기, 참 사회 만들기’로만 읽고 왜곡하게 된다. 역시 성경의 고유한 세계, 그것을 말하는 신학의 고유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다.
(4) 성화와 윤리를 올바르게 구별하고 연결하고 하는 경우. 이 경우가 유일하게 맞는 경우다. ❶우선 성화와 윤리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각각 독립된 세계다. 성화의 뜻과 윤리의 뜻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성화 없이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으며(비기독교인의 경우),
윤리 없이도(비 윤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윤리의 도움이 없이라는 뜻) 성화를 이룰 수 있다(기독교인의 경 우). 성화를 잘 하면,
대개의 경우 윤리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발생한다. 예컨대 나의 어머니의 수술을 위해서 500만을 빌려서 갖고 오던 길에
어떤 어려운 교회의 담임 전도사 를 만나게 되어서 얘기를 듣던 중에 내일 은헁 대출금 500만을 상환하지 않으면 곧 쫒겨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수술비 500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냥 주고 왔을 경우,
유교식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비윤리적 불효자 로 보일 것이고, 비기독교적 심리상담학으로 교육받은 가정상담사의 눈에는 가난에 쪄든
아내 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공감능력 부족의 무책임한 가장으로 보일 것이다. 산상수훈을 해 석한 웨슬리의 눈에는 그는 아마도
8복의 길을 잘 가서 “마음이 청결한 자”, 즉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충만한 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내가 쓰고 남는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서로 도우라”는 상호부조의 정신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 게 자로 보였을 것이다.
❷그러나 성화가 잘 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의 윤리를 누구 보다도 잘 모범적으로 지키며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그가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이유는 성화의 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언제나 윤리를
초월하고 그 사회규범적으로 안정된 구조를 파괴하는 힘과 경향성를 가졌기 때문이다), 성화의 길 안에서 예민하게 훈련된 “양심”,
즉 고후 1:12의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 때문이다. 양심 은 성화의 구성요소 가운데 비교적 초보적인 위치에서 기본적인 것이다.
성화와 양심은 동일 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화가 잘 되었는데 양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성화가 전혀 없이 양심이 있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비기독교인의 경우). 성화가 된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은 하나 님 앞에서의 양심이지만, 성화 없이 양심이 있는
사람의 양심은 사람들 앞에서의 양심이다. 아무튼 어떤 양심이 되었든지 양심이 있으면 윤리적일 수 있다. 그래서 성화된 사람은
그 사 회 안에서 윤리적으로 살 수 있지만, 성화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성화는 윤리와 다른 하 나님의 영역과 소통하는 무엇이다.
양심은 사회 안에서 인간적인 것들(역사, 공동체, 인권, 빈 부문제 등등)과 윤리적으로 소통하는 무엇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더라도 얼마든지 윤 리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성화의 길을 몰랐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역과의
소통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성화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윤리적인 것은 아니 다. 오히려 성화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의
편적 윤리적 기준들, 규칙들을 받아들 이기 힘든 경우들이 많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양심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위 보편적 이성과 양심을 모든 종교적 가치 위에 놓아야 한다는 윤리적 주장을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낙태 문제, 동성애 문제,
성전환 문제 등등에 대한 이 사회의 윤리적 기 준, 규범들을 나는 성회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윤리는 이성과 양심을 기준으로 삼고 낙태도 동성애도 성전환 문제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때 나 는 오직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해야 하기 때문에 윤리와 충돌할 수도 있 다. 어떤 때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말하는
소위 일반적인 기독교적 윤 리규범도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많다. 나의 마음 속의 양심의 소리를 발하면 나는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기독교인들에게도 비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평가 받을 수도 있다. 말하자 면 요한복음 8장을 근거로,
불륜의 현장에서 잡힌 것과 같은 여인에 대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 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해주었다고 해서
우리 집사람의 날카로운 질책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그 순간 우리 집 사람의 눈에는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비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성화와 윤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성화와 윤리는 같은 것도
아니고, 성화가 잘 되면 윤리도 그 만큼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성화와 윤리는 인과간계도 아니다. 좋은 성화가 좋은 윤리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좋은 윤 리가 좋은 성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또는 이 둘은 상호보완이 아니라서, 좋은 윤리도 갖고 동시에
좋은 성화도 갖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단 결론) 성화와 윤리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상호 인과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상호보완 도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윤리는 사람들 앞에서 서로 간에 인정하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소위 “참사람”되는 노력이다. 이 두 개는 동일한 것도, 상호 인과관계도, 상호보완도 아니다.
그냥 다른 두 개일 뿐이다. 이 둘은 때때로 겹쳐보이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예컨대 사랑, 공정, 정의, 정직, 희생 등의 개 념들.
그러나 이 개념들은 단어만 같을 뿐, 웨슬리가 “거의 그리스도인” 설교에서 말한 것처 럼, 윤리의 그것들과 성화의 그것들은
상호 다른 것이다. 그것도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람 들은 이 두 개를 상호동일, 상호인과관계, 상호보완이라고 착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웨 슬리는 윤리적인 인간 거의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으로서 산상수훈의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거의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성화를 잘 하면 그 만큼 더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는 예수님이 여기서 “the way to the life everlasting”을 말씀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설명한 것이다. -끝-
소개드리고 설명하겠습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은 윤리적으로는
정상이고, 또는 모범적인 인간이지만, 칭의와 중생이 아직 없고 따라서 성화는
전혀 없는 인간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자신이 회심(=칭의/중생)을 체험하기 전에
거의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진정한(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 즉 칭의/중생을 받고
성화의 길을 가 는 그리스도인은 윤리적으로 진일보한 삶을 사느냐? 즉, 회심 후의
웨슬리는 윤리적으로 진 일보한 삶을 살게 된 것이냐? 웨슬리는 회심 전에도
거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윤리적 인 인간이었다. 윤리적 차원에서 별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회심 후에도 그는 윤리적인 면 에서 회심 전과 동일했다.
그는 여전히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윤리는 회심과 성 화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에, 즉 이성과 양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회심과 성화이전에도 아무 문제없이 윤리적일 수가 있었던 것이 다.
그러면 회심과 성화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무엇이냐? 윤리적인 무엇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엇을 더하여 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거의 그리스도 인”이라는
설교에서 말하는 대로, 진정한 칭의의 믿음과 거기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여기서
나오는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것이 없이는 마지막 심판 때 주님을 뵈올 수 없다 하는
그 거룩”이고, 이 거룩이 이제 내게 있으니, 영생에 대 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회심과 성화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다. 이것은 윤리와 상호동일한 것도 아니고, 상호인과관계도 아니고,
상호보완도 아니다. 다른 차원의 또 다른 무엇이다. 웨슬리가 회심 후에도 윤리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것은 회심과 성화 덕분 이 아니다. 그는 회심과 성화가 전혀 없었을 때에도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인간이 아니었고, 오히려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칭 믿음과
자칭 성화가 있었을 뿐이었 다. 회심 전에 그가 헐벗고 병든 이웃을 도운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윤리이지 만, 회심 후에 그가 헐벗고 병든 이웃을 도운 것은 윤리가 아니고 그가 말하는
그 거룩, 즉 “그것이 없이는 마지막 심판의 주님을 뵈올 수 없다는 그 거룩”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는 회심 전이나 회심 후나 윤리적인 인간이었지만,
그의 눈과 하나 님의 눈에는 그는 윤리적 인간이 아니라, 거룩한 인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I.(I).1.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에는 첫째로 ‘기독교 바깥에서 말하는 정직성’(heathen honesty)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 하나 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기독교 바깥에서 말하는 정직성이라는 것은 비기독교적 철학자들의 저술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직성이 아니라, 보통 기독교 바깥의 사 람들이 상호간에 상대방에게 기대하며 또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의 그런 정직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직성의 규칙에 따라 그들은 이렇게 교육받는다: 불공평하지 말 것, 강도든지 절도든 지
이웃의 물건에 손대지 말 것,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 것, 누구에 대해서도 착취하지 말 것,
어떤 상거래에 있어서든 가난한 자나 또는 부유한 자나 간에 속이거나 지나치게 값을 받지 말 것,
누구에게서든지 그의 권리를 빼앗지 말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구에게든지 어 떤 빚이든지 지지 말 것.
2. 다시 말하여 [이 정직성이라는 것은], 기독교 바깥의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로는 진 리와 공의를
존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거짓을 숨기기 위하여 神을 증 인으로까지 부르면서
위증하는 사람을 혐오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무고하게 비방하고 중상 하는 자를 혐오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종류든지 간에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을 인류 의 수치거리요, 사회의 기생충으로 여겼던 것이다.
3. 또 다시 말해서 [이 정직성이라는 것은], 그들도 상호 간에 일종의 사랑과 조력을 기대 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그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수 있다면 어떤 도움이라도
나에게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확대 하여, 비용이 들지 않거나 노력이 들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하게 인정을 베푸는 일들로 발 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는 음식이 있으면 굶는 자를 먹이며,
남는 옷으로 헐벗은 자를 입히 며, 일반적으로 내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로
발전시켰던 것 이다.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포함되는 첫 번째의 것으로서 기독교 바깥의 정직성이라는
것은 (가장 낮은 의미의 정직성을 보더라도) 이 정도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II).4. ‘거의 그리스도인’에 포함되는 두 번째의 것은 경건의 외양,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지라고 권하는 바
그 경건의 단지 외양을 갖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겉모양만을 갖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거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금하는 것을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1). 그는 하나님 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 그는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맹세하지 않 는다. 다만 그의 말은 “예 할 때는 예”요,
“아니요 할 때에는 아니요”이다. 그는 주일을 어기 지 않으며, 그의 문 안에 있는 객이라도 주일 어기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으로 행하는 모든 간음과 혼외정사와 음난한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들을 직접 또는 간접 으로 지향하는 경향성이 있는 모든 말이나 모양을 피한다.
또한 모든 쓸데 없는 말들을 피한다: 남을 욕하는 것, 남이 없는 데서 험담하는 것, 남에 관한 소문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것, 독설을 입에 담는 것, ‘어리석고 실없는 농담과 익 살’(eutrapelia) - 이것을 기독교 바깥의
도덕가는 일종의 덕목으로 간주하였지만 - 이 모든 것을 멀리 한다. 간단히 말하여, ‘덕을 세우는데’ 소용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바 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모든 언사를 피한다.
5. 그는 ‘술 취하지 아니하며’3), 주연을 베풀고 흥청거리는 일과 탐식하는 일을 멀리한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다툼과
언쟁을 피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한다4). 남에게서 해를 입는 경우에도, 그는 복수하지 않는다.
즉,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그는 이 웃의 실수나 인간적 한계에서 오는 결함에 대하여 불평스럽게 욕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큰소 리로 야단치지 않으며, 조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누구에게도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이 너에게 행하는 것 을 네가 원치 않는 그 모든 일을
너도 그에게 행하지 말라”5)는 평범한 준칙을 따라 행동도 하고 말도 한다.
6. 그는 선을 행할 때, 값싸고 손쉽게 인정 베푸는 정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 단을 다하여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애쓰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 일이 그의 친구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그의 적들을 위한 것이든, 또는 악한 자 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든 상관없이, 수고와 고통도
불구하고 ‘그 의 손이 할 일을 찾는 대로 어떤 일이든지 힘써 행한다’. 이 일이든지 다른 일이든지 간에 게으르지
아니하며, 선을 행할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모 두 위하여, 모든 종류의 선을 행한다.
그는 근성이 악한 자들을 훈계하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며, 흔들리는 자들을 굳세게 하 며, 선한 자들을 격려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그는 잠자는 자들을 깨우기 위하여 수고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깨우신 바의 사람들은
죄와 불결을 씻도록 열려 있는 그 샘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씻고 깨끗해지도록 돕는 일에 힘쓰고 애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이미 구 원받은 사람들을 북돋우어 범사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드높이도록 하는 일에 수고를
아끼 지 않는다. “이렇게 묘사된 인간을 웨슬리는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사람은 겉모양은
그리스도인과 같으나, 그 속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직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위선적인 인 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에 의하면, 올바른 의미의 “거의 그리스도인”은 진 실성(sincerity), 즉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바라는 진실된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윤리적 차원을 말한다면, 그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윤리적인 인간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인간이다. 그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윤리적이다. 그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윤리적 모범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왜 그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아니라, 거의 그리스도 인 밖에 못되는 것인가?
웨슬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에게는 아직 진정한(=하나님의 칭의 의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속죄공로를
근거로 죄책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 의 증언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 사랑과 여기서 나오는 진 정한 이웃사랑이 아직 없고, 그 이유는 아직 칭의의 은혜에 의하여 부어진
“믿음”(justifying Faith)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믿음과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 사랑과 여기서 나오는
이웃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인데, 그런 사람이 이제 행하는 것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것과 같은 것, 소위 윤리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진일보한 윤리 적인 것도 아니다. 그의 마음과 행동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성화된 것)이다.
거의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고, 종교적, 윤리적으로 모범 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거듭난 영혼과 거기서 나오는 행위는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하나님사랑과 거룩한 이웃사랑의 상태인 것이고,
이런 영혼에서 나오는 외적 행위들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거룩한 선행이다.
선행 의 뜻은, 적어도 웨슬리가 볼 때, 칭의의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그래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율법)의 준행이다. 그 이외의 행위들은 선행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 람들끼리 좋다고 인정하는
행위들이라면, 윤리적 행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거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내면과 외면은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온전한 그리스 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되면 더욱 윤리적인 수준이 되는 것인가?
만일 웨슬리가 거의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을 구별하지
않았다면, 산상수훈 대로 성화의 길을 잘 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행위를 더욱 윤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만큼 더욱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웨슬리는 거 의 그리스도인을 지극히 윤리적인 인간으로 그려놓고 그런 사람은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이다”, 즉 결국 지옥을 면하지 못한다고 평가한 것이다. 반면에 온전한(=진정한) 그리스도인,
산상수훈의 길대로 성화를 잘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은 사랑으로만 충만하여 거룩하다고 하고, 그의 행동은
진정한 의미의 선행,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동인 것이다. 이 둘 사이 의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는
영벌에 해당되고, 다른 하나는 영생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사회 의 윤리학에는 이런 차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의 윤리학의 눈으로 볼 때, 성화된 사람이 더욱 윤리적이다라고 보지 않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성화는 영생을 위한 것, 다 시 말해, 웨슬리의 표현대로, “그것이 없이는 마지막 심판 때, 주의 얼굴을 뵐 수 없으리라는
바로 그 거룩”을 위한 것이지, 윤리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성화의 사람이 비윤리 적이다 라는 말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뜻이 아니라, 성화된 사람의 윤리는 성화에 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사회의 윤리학자가 보기에도 성화가 잘 되면 그 만큼 윤리적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의 윤리학이 윤리적 인간이 되기 위하여 기독교나 또는 여타의 다른 고등종교를 갖게 하자고 말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윤리는 그 뿌리를 종교 또는 기독교의 성화와는 전혀 다른 것들에 두고 있기 때 문이다.
즉, 이성과 양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이성과 양심을 윤리적으 로 쓰도록 교육하여 개인과 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이성과 양심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감화감 동 같은 것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공동기반이 있다면,
양심 정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성화된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이고, 윤리학의 양심은 사람들 앞에서의
양심이기 때문에 상호 대화의 기반으로서도 그 한계가 뚜렷하다. 만일 기독교인을 평가하여 “구원의 길을, 성화의 길을
잘 가고 있으면서, 또한 그의 삶은 그 사회 안에서도 그런 만큼 더욱 윤리적이었다” 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에
해당되 는 말들일 것이다:
(1) 성화와 윤리를 동일시 한 경우. 성화와 윤리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 혼용하여 사용한 경우다.
비학술적인 용어사용이고, 신학적, 윤리학적 진리 탐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혼동과 오류의 원인이 된다.
윤리학에도 신학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기독교적 윤 리학자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성화가 잘 되면, 사회 안에서도
그 만큼 더 윤리적이 존재 로 살 수 있게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이런 착각은 결국 성화를 윤리로 변질시켜서
“사회 안에서 모범이 되고 칭찬 받는 기독교인, 기독교, 교회가 되자” 부르짖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 게는 사회와
사람들의 칭찬이 그의 마음과 행동의 기준이 된다. 소위 ‘그 시대와 그 사회에 도덕적 모범이 되려는 마음으로
충실히 적응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이 경우에는 시야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사회윤리(소위 social ethics,
또는 social salvation, social sanctification[사회성화])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2) 성화를 윤리와 구별하지 못한 경우. 즉 기독교의 성화에 힘쓰는 것은 결국 여타의 고등종 교나 고등문화가 말하는
‘윤리적 삶’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성화의 길은 곧 인류 의 보편적 윤리의 이상, 말하자면 경천애인과 같은 것이다.
성화는 곧 양심적으로 서로 사랑 하고 살자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은 성경과 신학의고유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경우다. 예컨대 토착화신학이라고 하여 유교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 리는 결국 같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에
그런 오류를 흔히 볼 수 있다. 유교적 윤리가 결국 기 독교의 성화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예컨대 소위 “사람됨”이라는
개념이 양자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다라는 주장.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신학의 고유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많이 부족한 경우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소위 종교다원주의(모든 고등종교는 그 핵 심이 사랑으로서 상호 동일근본을
갖고 있다는 주장)가 여기에 해당된다.
(3) 윤리를 성화로 착각하는 경우. 즉, 윤리적 노력을 많이 하면 그 만큼 성화가 잘된다고 착 각하는 경우. 성화가 무엇인지,
성화가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회심 전에 웨슬리 자신이 이런 경우였고, 회심 전의 그런 자신을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비로소 회심 후에 깨닫고
그렇게 설명했던 것이다. 기독 교인들 가운데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또는 소위 해방신학, 민중신학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이 심화되면, 윤리가 신학을 대체하게 된다. 소위 인간 학이 신학을 대체하게 된다.
성경을 ‘참 사람 되기, 참 사회 만들기’로만 읽고 왜곡하게 된다. 역시 성경의 고유한 세계, 그것을 말하는 신학의 고유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다.
(4) 성화와 윤리를 올바르게 구별하고 연결하고 하는 경우. 이 경우가 유일하게 맞는 경우다. ❶우선 성화와 윤리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각각 독립된 세계다. 성화의 뜻과 윤리의 뜻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성화 없이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으며(비기독교인의 경우),
윤리 없이도(비 윤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윤리의 도움이 없이라는 뜻) 성화를 이룰 수 있다(기독교인의 경 우). 성화를 잘 하면,
대개의 경우 윤리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발생한다. 예컨대 나의 어머니의 수술을 위해서 500만을 빌려서 갖고 오던 길에
어떤 어려운 교회의 담임 전도사 를 만나게 되어서 얘기를 듣던 중에 내일 은헁 대출금 500만을 상환하지 않으면 곧 쫒겨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수술비 500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냥 주고 왔을 경우,
유교식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비윤리적 불효자 로 보일 것이고, 비기독교적 심리상담학으로 교육받은 가정상담사의 눈에는 가난에 쪄든
아내 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공감능력 부족의 무책임한 가장으로 보일 것이다. 산상수훈을 해 석한 웨슬리의 눈에는 그는 아마도
8복의 길을 잘 가서 “마음이 청결한 자”, 즉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충만한 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내가 쓰고 남는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서로 도우라”는 상호부조의 정신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 게 자로 보였을 것이다.
❷그러나 성화가 잘 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의 윤리를 누구 보다도 잘 모범적으로 지키며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그가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이유는 성화의 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언제나 윤리를
초월하고 그 사회규범적으로 안정된 구조를 파괴하는 힘과 경향성를 가졌기 때문이다), 성화의 길 안에서 예민하게 훈련된 “양심”,
즉 고후 1:12의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 때문이다. 양심 은 성화의 구성요소 가운데 비교적 초보적인 위치에서 기본적인 것이다.
성화와 양심은 동일 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화가 잘 되었는데 양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성화가 전혀 없이 양심이 있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비기독교인의 경우). 성화가 된 사람 속에 있는 양심은 하나 님 앞에서의 양심이지만, 성화 없이 양심이 있는
사람의 양심은 사람들 앞에서의 양심이다. 아무튼 어떤 양심이 되었든지 양심이 있으면 윤리적일 수 있다. 그래서 성화된 사람은
그 사 회 안에서 윤리적으로 살 수 있지만, 성화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성화는 윤리와 다른 하 나님의 영역과 소통하는 무엇이다.
양심은 사회 안에서 인간적인 것들(역사, 공동체, 인권, 빈 부문제 등등)과 윤리적으로 소통하는 무엇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더라도 얼마든지 윤 리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성화의 길을 몰랐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역과의
소통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성화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윤리적인 것은 아니 다. 오히려 성화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의
편적 윤리적 기준들, 규칙들을 받아들 이기 힘든 경우들이 많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양심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위 보편적 이성과 양심을 모든 종교적 가치 위에 놓아야 한다는 윤리적 주장을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낙태 문제, 동성애 문제,
성전환 문제 등등에 대한 이 사회의 윤리적 기 준, 규범들을 나는 성회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윤리는 이성과 양심을 기준으로 삼고 낙태도 동성애도 성전환 문제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때 나 는 오직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해야 하기 때문에 윤리와 충돌할 수도 있 다. 어떤 때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말하는
소위 일반적인 기독교적 윤 리규범도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많다. 나의 마음 속의 양심의 소리를 발하면 나는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기독교인들에게도 비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평가 받을 수도 있다. 말하자 면 요한복음 8장을 근거로,
불륜의 현장에서 잡힌 것과 같은 여인에 대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 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해주었다고 해서
우리 집사람의 날카로운 질책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그 순간 우리 집 사람의 눈에는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비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성화와 윤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성화와 윤리는 같은 것도
아니고, 성화가 잘 되면 윤리도 그 만큼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성화와 윤리는 인과간계도 아니다. 좋은 성화가 좋은 윤리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좋은 윤 리가 좋은 성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또는 이 둘은 상호보완이 아니라서, 좋은 윤리도 갖고 동시에
좋은 성화도 갖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단 결론) 성화와 윤리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상호 인과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상호보완 도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윤리는 사람들 앞에서 서로 간에 인정하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소위 “참사람”되는 노력이다. 이 두 개는 동일한 것도, 상호 인과관계도, 상호보완도 아니다.
그냥 다른 두 개일 뿐이다. 이 둘은 때때로 겹쳐보이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예컨대 사랑, 공정, 정의, 정직, 희생 등의 개 념들.
그러나 이 개념들은 단어만 같을 뿐, 웨슬리가 “거의 그리스도인” 설교에서 말한 것처 럼, 윤리의 그것들과 성화의 그것들은
상호 다른 것이다. 그것도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람 들은 이 두 개를 상호동일, 상호인과관계, 상호보완이라고 착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웨 슬리는 윤리적인 인간 거의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으로서 산상수훈의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거의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성화를 잘 하면 그 만큼 더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는 예수님이 여기서 “the way to the life everlasting”을 말씀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설명한 것이다. -끝-